I. 위기 상황의 진단
1. 혁신의 역설
혁신을 목표로 추진된 글로컬대학 사업과 무학과 제도가 오히려 혁신의 근간인 학문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전국 대학들이 정부가 제시한 '정답'에 맞춰 동일한 방향으로 수렴하면서, 바이오·반도체·모빌리티 등 소수 첨단 분야로의 과도한 집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통계로 입증된 기초학문 공동화
- 인문계열 유일한 순감소: 지난 10년간 폐과(76개) > 신설(50개)
- 인문사회계열 입학정원 20% 급감: 13만 3,215명 → 10만 6,692명 (2013-2022)
- 묻지마식 대학 통합: 충남대-한밭대, 부산대-부산교대 등 충분한 합의 없는 졸속 통합 확산
이는 특정 산업 구조에 종속된 취약한 고등교육 생태계를 조성하여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시키고 있습니다.
II. 현행 정책의 구조적 결함
1. 글로컬대학 사업의 문제점
- 자율성의 착시: 5년간 최대 1,000억 원 지원을 미끼로 한 정부 주도 획일화
- 통합 지상주의: 통합이 혁신의 '방법'이 아닌 선정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작용
- 첨단산업 단일경작화: 모든 대학이 유사한 목표로 수렴하여 국가 포트폴리오 편중
2. 무학과 제도의 치명적 한계
- 쏠림 현상의 필연성: 체계적 학문 안내 부재 시 취업 유리 분야로의 대거 몰림
- 구조조정 도구로 오용: 학생 선택이라는 시장 논리를 빌린 우회적 기초학문 정리
- 대학 본질 기능 훼손: 지식 생산 기관에서 단기 산업 수요 맞춤 인력 공급소로 전락
III. 학문적 다양성의 전략적 가치
1. 예측 불가능한 혁신의 역사
- GPS: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순수 물리학)에서 현대 위치 서비스로
- MRI: 핵자기공명 기초연구에서 생명을 구하는 의료기기로
- CRISPR: 요구르트 박테리아 연구에서 유전자 편집 혁명으로
이들은 모두 목표 지향적 응용연구가 아닌 호기심 기반 기초연구에서 탄생했습니다.
2. 기초과학의 경제적 효과
한국개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SCI 논문 수 1% 증가 시 국가 총요소생산성이 최대 1.3% 증가합니다. 기초연구 투자는 비용이 아닌 가장 확실한 고수익 국가 투자입니다.
3. 인문학의 현대적 의미
- 애플의 성공 비결: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 전략
- AI 시대의 필수 요소: 자연어 처리, AI 윤리, 편향성 문제 해결에 철학·언어학 필수
- 글로벌 역량: 문화인류학, 지역학이 제공하는 국제 비즈니스 및 외교적 통찰력
IV. 해외 모범 사례와의 대조
1. 독일 모델: 신뢰의 철학
- 훔볼트 전통: 학문 자유와 대학 자치 기반 연구-교육 통일
- 탁월성 전략: 과학자 주도 평가, 모든 학문 분야 개방, 상향식 접근
2. 프랑스 모델: 포괄적 지식 투자
- CNRS 시스템: 자연과학과 동등한 위상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소 운영
- 미래를 위한 투자(PIA): 특정 분야 한정 없는 총체적 지원
한국의 현실: 통제 중심 단기 성과 추구 vs 해외의 신뢰 기반 장기 투자
V. 긴급 대안 방안
1. 즉각적 중단 조치
- 글로컬대학 사업 중단: 2025년 추가 선정 전면 보류, 기선정 대학 재협상
- 무학과 제도 확산 중단: 국립대 육성사업 연계 해제, 재정 지원 조건 폐지
2. 기초학문 생태계 복원
- 인문사회기초과학진흥법 제정: 기초학문을 국가 핵심 인프라로 명시
- 장기 안정 지원: 경쟁적 과제가 아닌 기관 총액 지원(Block Funding) 도입
- 통섭형 연구 클러스터: 과학-인문학 융합 연구 명시적 장려
3.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권역별 대학 연합 모델
- 글로컬대학의 획일적 통합 대신 자발적 협력 기반 연합체 구성 (예시):
충청권: 충남대학교 + KAIST 연합
호남권: 전남대학교 + GIST 연합
대경권: 경북대학교 + DGIST 연합
동남권: 부산대학교 + UNIST 연합
- 3단계 점진적 로드맵:
1) 심화 협력 및 공동 사업 추진
2) 연합 거버넌스 구축 및 전략 공유
3) 법제도 정비 및 자발적 통합
4. 진정한 대학 자율성 강화
- 정부 역할 전환: 감독관에서 후견인으로, 지시·통제에서 지원·신뢰로
- 평가 체계 혁신: 동료 평가 중심, 장기적 기여도 측정, 과정 중심 평가
5. 회복탄력적 혁신 생태계 조성
- 포트폴리오 다양화: 위험 분산을 위한 다양한 학문 분야 균형 지원
- 예측 불가능성 수용: 계획할 수 없는 혁신을 위한 여유 공간 확보
- 실패 관용 문화: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을 허용하는 관대한 연구 환경
VI. 긴급 촉구
1. 시급성의 강조
현재의 글로컬대학 사업과 무학과 제도는 혁신의 가면을 쓴 파괴 정책입니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매일 지연될수록 우리나라 고등교육 생태계의 다양성과 창조성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됩니다.
2.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
필요한 것은 속도 조절이 아니라 완전한 방향 전환입니다. 통제에서 신뢰로, 획일화에서 다양성으로, 단기 성과에서 장기 투자로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합니다.
3.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메마른 사막이 아닌 풍요로운 지적 생태계를 물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의 편의를 위해 내일의 가능성을 희생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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