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수시제도에서 학생들은 만능인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교과 성적도 좋고, 동아리활동도 주도적으로 하고, 각 교과의 수행평가활동도 충실히 하고, 진로에 맞는 또 다른 활동도 하고 말이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수시가 도입되기 전에도 교사들은 생활기록부를 통해 학생들의 삶의 한 부분을 기록해왔다. 그러나 현재는 매우 구체적으로 매우 정밀하게 그들을 평가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기록되고 있음을 알고, 교사들은 매순간 학생들의 삶을 기록해야 함을 강박관념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사들은 기록자이자 감시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교사들은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과장하기도 한다. 인정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기록자들의 난처함은 학기말과 학년말에 푸념으로 교무실 한 공간을 떠돈다.
수업시간에 어떤 특징을 보였는지, 동아리시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학급에서는 어떤 아이였는지, 그리고 봉사는 얼마나 했는지, 학교의 각종 행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교사들은 끝없이 관찰하고 기록해 나간다. 성실한 교사일수록 더욱 열심히 기록한다.
아이들은 교사의 눈에 비치는 자신이 모습이 어떠한지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더 유능하고 성실하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기록되어 질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내려 한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길러내는 학생들은 ‘말 잘 듣는’ 체제 순응적인 학생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에도 학교는 학생들에게 규율을 지키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왔지만 이토록 세세하게 그들의 정신까지 지배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기록의 문제는 또 한편으로 학생들을 이해타산적인 외재적 보상으로 길들여지게 한다는 데 있다. 수시제도를 통해 우리는 학생들의 학교활동을 내재적 기쁨이 아닌 외재적 보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수업을 할 때, 동아리 활동을 할 때, 학급활동을 할 때, 학생회 활동을 할 때, 봉사활동을 할 때, 그 외 많은 자율 활동을 할 때 학생들은 그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이나 성취감도 있겠지만, 그 활동이 내가 대학을 갈 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학생들의 잘못은 아니다. 제도가 내재적 보상을 외재적 보상으로 변환시킴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는 삶의 매순간 계산하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인간으로 성장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과연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인가?
시험이 끝나면 몇 명의 학생들은 전학을 가고, 또 몇 명의 학생들은 자퇴를 하기도 한다. 내신 성적의 압박감이 아이들에게 교실을 삶의 터전이 아닌 전쟁터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한다면 비약이 심한 것인가? 시험이 끝나면 미안하고 아프다. 어렵게 출제해서 미안하고, 좌절감을 갖게 해서 미안하고, 입시라는 전쟁터에서 가혹한 전쟁을 치르게 해서, 그리고 친구들에게 의지하지도 못하게 하는 이런 제도에 일조해서 미안하고 아프다.
내신의 상대평가는 같은 학교의 학생들을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만든다. 수시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신 성적이다. 아무리 다양한 활동을 해도 내신 성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을 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내신 성적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학생들에게 지대한 관심사가 된다. 1학년 때의 4번의 시험, 2학년 때의 4번의 시험, 3학년 때의 2번의 시험이 자신들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매 시험 때마다 긴장감을 갖고 시험에 응한다.
내신 성적은 절대 평가가 아니라 상대평가이다. 내가 시험을 잘 봐도 다른 학생들이 잘 본다면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 후 아이들은 자신의 성취보다도 다른 아이들이 어떤 성적을 받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아이들은 친구들의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다. 친구들의 성취는 상대적으로 나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의 성취에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모두 성취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임을 알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시험기간 내내 학생들과 교사들은 긴장과 불안의 상태이다. 학생들의 긴장과 불안은 내신이 곧 대입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럼 교사들은? 교사들은 시험문제에 오류가 생기면 어쩌나, 다들 시험을 잘 봐서 1등급이 증발하면 어쩌나 하는 점에서 불안하고 긴장한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중시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제도가 학생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를 밟아야 내가 올라간다는 것 아닌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에 대해서도 학생들은 은연 중에 배운다. 말과 행동이 다름을 제도가 보여주고 있고, 그들 또한 말과 행동이 달라도 됨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로 학생들이 자라나길 바라는 것인가? 이쯤 생각해보면 차라리 학생들이 학교교육에 충실하지 않아도 되니 친구들을 경쟁자가 아닌 함께 힘든 시절을 보내는 동료로 살아갔던 시절이 더 나은 게 아닌가도 싶다. 적어도 대학입시에서 내신 성적이 비중 있게 반영되기 전에는 내 옆의 친구가 직접적인 경쟁자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두려운 경쟁자들이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은 그런 것인가?
입시제도에 인간에 대한 성찰과 의미를 담아내지 않고 제도가 주는 피상적인 긍정적 측면만을 주장하고 강행한다면 우리는 미래사회의 생산성을 높이는 성과주체를 길러낼 수는 있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움을 갖는 존재로 성장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외적 보상에 길들여지고 잘 보이기 위해서 애쓰고, 가까운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며, 등급으로 동료들을 구분하는 데 익숙한 아이들,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가는 것은 제도의 문제이다. 지금이라도 인간다움을 담는 제도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아이들이 겪은 고통과 상처가 우리 사회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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