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건축 설계공모판의 로비를 관행이라고 합니다. 로비나 사전접촉 없이는 당선이 어렵다며 어쩔 수 없는 일쯤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영업의 한 방법이라고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심사행위는 청탁금지법에 의한 공무수행사인으로서 규정 위반 시 처벌이 가능합니다. 금품 수수의 대가성이 입증되면 형법에 따라 가중 처벌되기도 합니다. 이건 관행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입니다.
우리는 보통 설계공모 참가자를 선수라고, 또 심사위원을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승패가 갈리는 운동 경기와 비슷하기에 쉽게 납득이 가는 비유입니다. 만일 심판이 경기 중에 편파적 판정을 하면 야유를 보내며 비디오 판독을 통해 오류를 찾아내려 합니다. 오심 가지고도 이 정도인데, 만약 한 선수가 승부 조작을 해서 경기 결과를 조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 선수는 스포츠 정신 위배라는 낙인이 찍혀 스포츠계에서 영원히 퇴출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나라 건축 설계공모판에서는 이런 범죄가 이토록 관대하게 취급될까요?
근본적으로 설계공모와 관련된 불공정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감시 시스템과 처벌 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건축사협회는 자체적인 윤리 규정을 통해 건축사에 대한 징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태생적으로 협회의 주목적이 회원의 권익 보호이기에 실질적으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심사위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교수에게는 건축사 윤리 규정과 같은 통제 수단조차 없습니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지점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심사위원의 자질 문제입니다. 심사위원이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좋고 나쁜 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외부의 압력에 쉽게 흔들리게 됩니다. 불공정이 깃들기에 딱 좋은 환경인 것입니다. 심사위원은 기본적으로 공정성과 전문성을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문제는 공정성의 경우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전문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적어도 전문성은 몇 가지 측정할 객관적 기준을 마련할 수 있고, 또 어차피 전문성이 부족한 심사위원은 공정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좋은 안을 선택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전문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제안을 드립니다.
1. 먼저 설계공모와 관련된 정책과 제도 개선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적 기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지금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를 사명감과 개혁 의지를 가진 좋은 인재로 채워서 다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2. 설계공모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표준화된 시스템을 구축해 주십시오. 장기적으로는 건축허브(https://www.hub.go.kr/)가 이러한 역할을 맡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전국 900개에 달하는 발주기관에서 시행하는 모든 설계공모 관련 정보를 하나의 플랫폼으로 모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 대신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하는 디테일한 설계공모 관련 정보의 목록을 만들고, 모든 발주기관이 이를 open API를 통해 외부로 공개하게끔 해주십시오. 설계공모에 관한 모든 내용이 자유롭게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될 수 있어야 자연스럽게 불공정이 깃들 여지도 없어지게 되고, 국가 정책 수립을 위한 자료로서의 역할도 하게 됩니다.
3. 심사위원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인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주십시오. 지금 심사위원 선정의 가장 큰 문제는 전문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묻지마식 자천제에 있습니다. 일정한 기준으로 심사위원의 건축 작품이나 수상 실적, 관련 논문, 전문 분야 등을 조사하여 용도와 규모 등의 세부적 자료와 함께 데이터베이스화 한다면, 심사위원 선정에 공정한 객관성과 함께 합리적인 근거까지 제시할 수 있게 됩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되는 이러한 데이터베이스는 설계공모의 특성에 따라 검색 조건을 달리하면 유연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개방적 심사위원 풀로서 작동될 것입니다. 이미 서울시는 올해부터 이러한 시스템을 실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https://www.yna.co.kr/view/AKR20250617153100004).
4. 조달청의 건축 설계공모 발주 업무를 멈춰주십시오. 더 이상 건축 설계는 양적 ‘조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건축에 대한 안목과 의지 없이 공정성 자체가 목표가 되면 조직의 구성원들은 무오류의 환상에 둘러싸여 오히려 더 큰 불공정을 낳습니다. 대신 건축허브와 같은 꼼꼼한 온라인 시스템과 전문성 중심의 인적 데이터베이스가 결합되면 설계공모 경험이 많지 않은 발주기관도 큰 문제없이 스스로 설계공모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현재 자천제 교수 중심으로 되어있는 각종 공공기관, 공사, 공단의 심사위원 풀을 리셋 시켜 주십시오. 국가철도공단, 한국농어촌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 다수의 지방 교육청 등에서 운영하고 있는 심사위원 풀은 자천제를 악용하여 한국의 건축 설계공모판을 로비로 물들인 교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풀은 전문성 기반의 유연한 인적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으로 교체되어야 합니다.
6. 사전접촉에 대해 확고한 징계 절차를 마련해 주십시오. 형사적 처벌까지는 어렵더라도, 사전접촉에 응한 심사위원의 경우 심사위원 자격 영구 박탈, 사전접촉을 시도한 업체의 경우 해당 발주기관의 설계공모에 몇 년간 응모 금지 등의 강력한 징계가 필요합니다. 대한건축사협회는 회원의 권익 보호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정 능력을 잃었습니다. 의무가입을 시행하면서 스스로 만든 윤리규정에 따른 징계도 실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강력히 나서야 할 때입니다.
7. 한시적으로라도 공정설계공모 모니터링 업무 용역을 발주하여 소위 ‘암행어사’와 같은 제도를 운영해 주십시오. 로비를 당연시 하는 풍토에 강력한 형사적 처벌이라는 경종을 울려야 몇 십 년 동안 곪을 대로 곪은 이 업계가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이재명 정부의 출범과 함께, 우리나라의 지금 위상에 걸맞은 건축계로 새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긴 제안의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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