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은행에서 18년 동안 재직하며 은행 중장기전략 수립, 기업 여수신 상품 담당, 투자상품전략 기획 등 다양한 본부 부서 업무와 고객과의 접점에서 영업활동을 수행해 왔습니다. 최근 자본시장으로의 투자 확대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큰 갈채를 보내며, 미력하나마 아이디어를 보태고자 이 글을 씁니다.
1. 국내 펀드시장의 현실
우리나라 펀드시장은 2024년 1,098조원이라는 의미 있는 규모를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모펀드가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일반 투자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2019년 이후 계속된 대규모 환매중단 사태로 인해 국민들의 펀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환매중단 사태의 주요 원인은 업력이 낮은 사모전문자산운용사와 개인투자자 간 정보 비대칭성, 영세 운용사의 내부통제 미비, 대형 판매채널 중심의 간접판매 행태 등입니다.
2. 한미 펀드 공시의 격차
미국은 모든 펀드가 'Form ADV'라는 83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의무 제출합니다. 공모·사모·벤처캐피탈까지 모든 펀드가 운용사 재무상태, 임직원 징계이력, 투자전략, 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누구나 온라인에서 무료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환매위험을 "환매가 지연될 수 있습니다"라고만 표기하고, 기초자산 정보도 불명확합니다. 특히 환매지연 사유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실제 발생 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금융소비자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3. 판매사의 구조적 한계
대형마트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해 소비자가 피해를 봤다고 해서, 각 마트마다 화학성분 연구소를 운영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행이나 증권사가 모든 펀드의 기초자산을 직접 검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법원도 "판매회사는 운용사에서 받은 설명서를 고객에게 설명하면 되고, 내용이 진실한지 독립적으로 확인할 의무는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해외펀드의 경우 각 판매사가 개별 실사를 진행하면 막대한 비용이 펀드보수에 반영되어 상품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4. 해결책: "자본시장감독원(가칭)" 설립
식품·의약품처럼 펀드에도 인증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자본시장감독원의 주요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펀드 인증 제도: 국내 판매 모든 펀드의 기초자산 실사 및 계약 진위 확인, 인증마크 부여
②상시 모니터링: 펀드 운용내역 실시간 감시, 이상징후 조기경보
③투자자 정보제공: 펀드별 위험도 등급 평가 공개, 온라인 정보공개 시스템
④영세 운용사 지원: 준법감시 업무 지원, 내부통제 컨설팅
설립은 정부 출연 공공기관 또는 금융기관 공동출자 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습니다.
5. 추가 제언: 환매지연 사유 명시 의무화
현재 "시장 상황에 따라 환매가 지연될 수 있다"는 모호한 표현을 개선해, 환매지연 가능 사유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도록 의무화해야 합니다. 기초자산 매각지연, 외환규제, 유동성 부족 등을 명확히 기재하고, 열거된 사유는 투자자 책임, 미열거 사유는 운용사 책임으로 명확히 해야 합니다.
6. 기대효과
"자본시장감독원" 설립과 "환매지연 사유 명시 의무화"로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①통합 실사로 중복비용 절감 및 펀드보수 인하
②사전 검증으로 부실펀드 차단 및 투자자 피해 예방
③검증된 해외펀드 도입 활성화로 투자기회 확대
④투명한 정보제공으로 자본시장 신뢰 회복
7. 맺음말
한국 사회의 '펀드 불신'을 해소하려면 근본적 시스템 개선이 필요합니다. 미국처럼 모든 펀드에 대한 검증 시스템을 구축하고, 식품·의약품처럼 펀드에도 신뢰할 수 있는 인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부의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이 성공하려면 먼저 '믿을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본시장감독원(가칭)" 설립과 "환매지연 사유 명시 의무화"는 그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18년차 은행원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국민으로서 더 이상 선의의 투자자가 정보 부족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없기를,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건전하게 발전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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